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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스탬프 투어

경복궁 관람 후기! (+국가유산 방문자여권 스탬프투어) (++4.2. 벚꽃 개화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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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벚꽃 구경하러 경복궁에 다녀왔어요!

4월 2일자 벚꽃 개화 현황입니다!

겸사겸사 국가유산 스탬프도 찍고 왔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여기 공사로 막혀있었는데'ㅅ'!

10시 55분쯤 도착했는데 마침 11시에 광화문 교대의식이 진행된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구경했어요! 

15분 걸린다고 써있는데 실제로는 10분 정도 진행됐어요.

광화문 월대

월대는 특별한 행사를 위해 건물 앞에 마련한 넓은 대를 말한다. 고종 즉위 후 1868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을 짓고 월대를 갖추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드높였다. 조선시대 궁궐 정문 앞에는 월대를 두어 왕이 참석하는 의례를 거행하고 백성들과 소통하였다.
1923년 전차선로가 지나게 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2010년 광화문 복원 당시 지하에서 흔적을 찾아냈다. 2023년 발굴 조사하여 규모와 구조를 확인하고 흩어져 있던 옛 부재를 거두어 제 모습으로 되살렸다.
광화문 월대는 길이 약 48m, 폭 약 30m이며 장대석 기단 두 단으로 주변보다 바닥을 올렸다. 남쪽 끝에 계단을 두었으며 가운데에 폭 7m 정도의 어도를 설치하여 왕이 출입하는 광화문 중앙 문에 맞췄다. 월대 좌우에는 돌난간을 장식하여 정면인 남쪽에서만 출입하도록 유도하였다.
난간과 계단 석재는 구 부재와 신재를 섞어서 다시 세웠다. 다행히 동구릉과 호암미술관에 구 부재 일부가 남아 있었고, 발굴하면서 드러난 석재까지 재사용하였다. 월대 전면 좌우에 둔 해치는 월대로부터 40여 미터 남쪽에 있었으나 도로 사정을 감안하여 현재 위치에 세웠다.

출처: 안내팻말

잠깐 요기하러 국립고궁박물관 방문'ㅅ'...

사랑카페는 경복궁 경회루 근처에도 있어요!

한복 입고 갔는데 한복 착용자는 무료예요!

발권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됩니다!

예전에 장만했던 그 한복 그대로'ㅅ'//

좀 추웠따....

경복궁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태조 4년)에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으로 경복궁이라 이름 지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지금의 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풍수지리적인 터잡기에서도 한양의 중심을 차지했다.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관청가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를 조성하고, 그 연장선 위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주요한 궁궐건물들을 일렬로 놓아, 왕조국가인 조선의 상징 축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후, 1610년 제 2의 궁궐인 창덕궁은 재건하였으나 경복궁은 270년 이상 폐허로 남게 되었다. 1867년(고종 4년)에 비로소 왕조 중흥의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691,921제곱미터의 광활한 대지에 약 500여동의 건물들을 건립하였으며 조선 왕실의 전통과 현실을 조화시켜 전체적으로는 규칙적 배치를 따르면서 부분적인 변화를 가미하였다. 중건된 경복궁은 정무공간을 중심부에 두고, 좌우 뒤편으로 왕족의 생활공간, 그리고 곳곳에 정원시설들이 배치되어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중심부의 일부 건물들만 남았고, 광화문을 비롯한 외전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의 정면을 막기도 했다. 1990년부터 복원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원래의 흥례문과 행각을 복원했고, 왕과 왕비의 침전 및 왕세자가 기거한 동궁을 비롯하여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도 다시 복원하여 경복궁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 중이다.

출처: 안내팻말

현충원이랑 좀 비슷한 배치인데 여기가 사진 찍기 좋아서 사람이 많더라고요'ㅅ'

만개까지는 아니에요.

만개하면 멋질 듯.

근정문
근정전

근정전 일원

1867년에 중건된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큰 조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를 치르는 정전으로, 사방에 행각을 둘러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앞마당에는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돌인 품계석을 두 줄로 세워 벼슬아치들을 세우는 기준으로 삼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아 궁궐 안에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이루었다. 근정문 바깥에도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금천을 가로지르는 왕의 길을 제외하고 시설물이 없이 비워진 신성한 공간이다. 근정전 내부는 2개 층을 터서 높고 웅장한 공간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어좌를 놓아 왕의 권위를 상징화했다. 2001년에 흥례문과 외행각, 영제교 등을 복원했다.

출처: 안내팻말

사정전

사정전 일원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1867년 다시 지어진 사정전은 공식 업무공간으로 마루만 깔려 있지만,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은 비공식 업무공간으로서 온돌방을 두어 왕과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에 천지현황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창고가 있는데 이곳에는 왕실의 물품들을 저장하였다.

출처: 안내팻말

천추전
강녕전

강녕전과 교태전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공간 영역이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강녕전은 왕이 독서와 휴식, 신하들과 면담을 하던 곳이고, 안채에 해당하는 교태전은 왕비가 거주하면서 궁 안 생활을 총지휘하던 곳이다. 1917년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으로 옮겨 사라진 것을 1995년 다시 지었다.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4기의 장식적인 굴뚝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아미산 정원은 뒷산인 백악의 정기를 침전까지 이어주며, 왕비의 후원답게 은밀하면서도 기품 있게 꾸며졌다.

출처: 안내팻말

우물
교태전

그냥 옛날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은 느낌.....

중간중간 벚나무가 보이긴 한데 큰 벚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수준이라 벚나무가 몰려있는 걸 보고 싶으면 벚꽃축제 진행하는 장소로 가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다만 경복궁 뷰포인트는 벚나무를 바로 근처에 보이는 북악산, 인왕산과 같이 감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미산 굴뚝

왕비의 침전 뒤쪽에 인공으로 계단식 정원을 만들고, 가운데 단에 육각형 굴뚝 4개를 나란히 세웠다. 흙을 구워 만든 연한 주황색 전벽돌 몸체 위에 기와지붕을 얹고 그 위에 4개씩의 작은 굴뚝을 모았다.
몸체에 조각된 여러 무늬들은 각각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봉황은 왕비를, 박쥐는 부귀를, 매화와 국화는 군자의 심성을, 학, 사슴, 불로초, 소나무, 대나무, 돌 등 십장생은 장수를 뜻한다. 정원의 아랫단에는 돌로 만든 그릇인 돌함지와 화분 등이 놓였는데, 함월지는 달이 담긴 호수를, 낙하담은 노을이 비친 연못을 의미한다.
계단식 정원은 산을, 돌함지 따위는 호수를, 굴뚝의 무늬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상징하여 아미산 정원은 신선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상징한다.

출처: 안내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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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이 왕비의 후원이라는데 솔직히 여자 눈으로 봤을 때 이 굴뚝이 예뻐보이지는 않는데요....

차라리 나무를 몇 그루 더 심거나 꽃을 심어놓는 게 더 예쁠 듯....

굴뚝을 왜 갖다놓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해집니다.... 

중간중간 벚나무 근처에 사람들이 많아요ㅎㅎㅎㅎ

딱 봐도 만개는 아니죠?

자경전

자경전 일원

헌종(24대 왕)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는 고종(26대 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보답하여 흥선대원군은 조대비를 위한 거처를 궁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1888년 재건된 자경전을 중심으로 서북쪽 복안당에 온돌방을 들여 겨울용 침전으로, 동쪽 청연루에는 누마루를 설치해 여름용 거실로 삼았고, 협경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연결시켰다. 뒤편 담장의 십장생 굴뚝은 여러 개 온돌방의 굴뚝들을 하나로 합친 집합굴뚝이며,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식물들을 조각하여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서편 담장에도 여러 꽃나무들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자들을 새겨 넣어, 나이 든 대비전 주인의 장수를 기원했다.

출처: 안내팻말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십장생 굴뚝은 자경전 뒷담과 굴뚝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자경전에는 많은 온돌방이 있었는데 각 방들과 연결된 연기 길을 모아 하나의 굴뚝으로 만들었다. 굴뚝 정면에는 가운데에 해, 산, 물, 돌, 구름, 학, 소나무, 사슴, 거북, 불로초의 십장생 무늬를 넣었고, 그 위와 아래에 학과 나티 및 불가사리를 배치하여 불로장생 등 길상의 기능과 악귀를 막는 벽사의 역할도 갖추도록 하였다. 굴뚝으로서의 실용적인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 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출처: 안내팻말

국립민속박물관 근처에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어요~

향원정

향원정과 건청궁

고종 내외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했다. 침전인 곤녕합, 옥호루와 왕의 사랑채인 장안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곤녕합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다. 후궁영역의 뒤 정원으로 만들어진 연못 안에는 원래 취로정이 있었는데 건청궁을 창건하면서 그 자리에 향원정을 새로 지어 건청궁의 앞 정원이 되었다.

출처: 안내팻말

다리 쪽 문이 닫혀있어서 향원정 안쪽까지 가볼 수는 없었어요.

분홍색은 못 참지!

취향교

취향교는 건청궁 영역과 연못 안에 있는 향원정을 연결하기 위한 둥근 나무다리이다. 원래 향원정 북쪽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자 1953년 향원정 남쪽으로 옮겨 세웠다. 2017년 발굴조사를 거쳐 취향교 원래의 위치를 확인한 후 남쪽 다리는 철거하고, 사진 등을 참고하여 2019년 복원하였다.

출처: 안내팻말
건청궁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어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출처: 안내팻말

곤녕합

곤녕합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일상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7년간 왕실 의사로서 왕비를 모신 미국인 앨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성품이 부드럽고 친절하며 조선여성의 미를 갖춘 미인이라고 회상하였다.
1895년 2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만주까지 침략하자 조선 왕실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국내에서 철수시키려 하였다. 이에 일본 군부는 왕실을 압박하는 비상사태를 만들기 위해 10월 8일 새벽에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장교들이 건달들을 끌고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락에서 태우고 남은 뼈를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시신을 안치하고 국장을 지냈다.

출처: 안내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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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합 근처도 아직 꽃은 안 피었어요.

뭔가 낙선재랑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이런 건물양식이 대세였나 봐요.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은 왕세자 및 세자비의 거처로서, 자선은 '어진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자선당은 세종 9년(1427) 근정전의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설과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에 중건되었다.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에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1916년에 자선당을 동경에 있는 자신의 자택으로 옮겨 '조선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1993년 당시 문화재전문위원 김정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에 국내로 들여왔으나,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동궁 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재사용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출처: 안내팻말

정전이랑 비슷해보이기도...

진달래도 활짝 피었어요!

장안당

한국의 전기 발상지

이곳은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전소를 설립하여 1887년 3월 6일 건청궁 전등에 점화하고 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함으로써 이땅에 비로소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출처: 안내석판

집옥재 일원

집옥재 일원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이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출처: 안내팻말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모양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중국풍의 요소가 섞여있다고 하네요~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를 작은도서관으로 만들어놨네요!

다만 조명이 다소 어두워서 책을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잠시 앉아있다가 이동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도 엄청 걸었거든요ㅠㅠ

팔우정 내부

집옥재 근처에는 태원전이 있는데 저는 태원전은 방문하지 않아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러 가봐야겠어요~

장고

장고

장고는 궁중 연회나 제례에 쓰이는 장을 보관하던 곳이다. 북궐도형에는 함화당과 집경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장고가 있는데, 이곳은 서쪽 장고로서 태원전과 경회루 사이에 위치한다.
큰 잔치가 있을 때는 임시주방인 숙설소가 장고 가까이에 설치되었으며 장고마마가 장독들을 관리하였다. 현재 장고의 모습은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2005년에 복원한 것으로 경사지를 활용한 계단식 장독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된 독은 2007년에 전국에서 수집한 것으로 우리나라 독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출처: 안내팻말

문이 닫혀있어서 들어가보진 못했어요.

함화당

함화당과 집경당

중궁전인 교태전 북쪽에는 홍복전과 여러 빈들의 거처인 후궁 영역이 있었다. 이 영역과 관련 있는 내전 가운데 함화당과 집경당이 남아 있는데, 외국 사신을 접견한 기록이 간간이 등장할 뿐 건물의 용도가 명확지 않다.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높은 복도가 남아 있어서 원래 궁궐의 복잡한 통로 체계의 흔적을 보여주며, 집경당에 돌출된 누마루에서 북쪽 향원정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 안내팻말

사람이 별로 없다 싶었더니 후궁 처소여서 그랬나 보네요.

홍복전

홍복전

홍복전은 경복궁의 내전 안에 있던 편전이었다. 1860년대 고종 초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지었다. 홍복전은 임금이 관원들을 만나 국정을 처리하거나 경연을 열거나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사절들을 만나는데 주로 쓰였다. 그 밖에 부마를 간택하거나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등의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당시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 큰 불이 났을 때 강녕전, 교태전 등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창덕궁의 내전 건물들을 다시 짓는 자재로 쓰여 없어졌다. 2018년에 복원하였다.

출처: 안내팻말

아직 현판이 안 걸려있는 걸로 보아 완전히 복원된 것 같진 않아보여요.

경회루
경회루

경회루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867년 재건되었다. 높은 2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7x5칸, 바닥면적 933제곱미터(282평)로 현존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2층 마루는 3겹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심 3칸은 천지인을, 그 바깥 12칸은 1년 12달을, 가장 바깥의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 등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으로 상징했다. 중건 당시에 경회루 연못에 2마리 청동 용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안내팻말

경회루도 다리 쪽 문은 닫혀있어 멀리서 구경만 가능했어요.

경회루 근처에 사랑카페 있고 국가유산 스탬프는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기념품보다 장신구가 제일 갖고 싶었어요'ㅅ'!

나이가 드니 귀걸이도 주렁주렁보다는 이렇게 깔끔한 게 더 좋더라고요.

수정전

수정전과 궐내각사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관청을 궁궐 안에 설치해 궐내각사라 불렀다. 비서실인 승정원, 서적 편찬을 맡았던 홍문관, 의료기관인 내의원 등 크고 작은 관청들이 근정전 서쪽에 있었다. 세종 때 한글 창제의 무대가 된 집현전은 지금의 수정전 자리에 있었다. 1867년 중건된 이곳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수정전은 일상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내각 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안내팻말

다시 맨 처음의 현충원과 비슷한 곳으로 돌아와서 꽃구경 조금 더 했어요.

사람 여기가 제일 많은 듯...

보시다시피 아직 꽃이 많이 피지 않았어요.

고궁박물관 사랑카페 바로 옆 경복궁역에서 충무로역으로 이동했어요!

 

조선시대 정궁이라더니 정말 엄청 넓더라고요....

다 둘러보지 않았음에도 경복궁에서만 만보 찍음....

창덕궁에서 지낸 왕들도 많다는데 오히려 지나치게 넓어서 지내기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창덕궁보다 관람객도 훨씬 많았어요.

국가유산 스탬프가 목적이라면 경회루 쪽으로 가세요!

그리고 날씨가 다소 흐리고 바람이 불어서 추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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