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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여행

[서울여행]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방문 후기! + 주차 정보(서초구 가볼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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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매헌)역에 가서 윤봉길의사기념관에 들렀다가 양재시민의숲 산책을 했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양재시민의숲(매헌)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됩니다!

뱃가죽이 등에 붙는 느낌이라 밥부터 먹으러 분식집에 들어갔는데..

스파게티오므라이스 먹었어용.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무 잘 먹는 거 아니냐.....

스파게티, 샐러드는 괜찮았는데 오므라이스 아무 맛 안 나는 거 실화냐....

정말 말 그대로 아무맛도 안 남....

분식집이니까 이해합니다......

그치만 돈 내고 먹는 건데 아무 맛이 안 나다니ㅠㅠ

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호라고 합니다!

근데 윤봉길 의사 고향이 충남 예산이라는데 왜 기념관이 여기 있을까?

주차장 정보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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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오니 건물이 커요.

관람시간 참고하세요!

무료관람입니다!

로비에는 윤봉길 의사 동상이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윤봉길 의사이기에 태극기와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입구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이 제1전시실

왼쪽이 제2전시실입니다.

제2전시실 입구 옆에는 기념품샵이 있어요.

종류가 많지는 않더라고요.

상하이의거 전에 김구 선생과 회중시계를 교환했다던데 기념품 중에 시계가 있더라고요.

제1전시실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출생부터 상하이로 건너가기 전까지

제2전시실에서는 상하이에 도착하고 나서 상하이의거 후 순국 그리고 유해봉환과 카이로회담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이름은 우의이고 별명이 봉길이라고 하네요.

파평 윤씨 28대손이라고 합니다.

파평 윤씨 선조로는 윤관 장군님이 계시다고 하네요.

전시물 대부분이 복제라고 써있어요.

근데 충남 예산에도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어서 원본은 다 그곳에 있는 것 같아요.

2016년에 매헌기념관 관리가 서울특별시에서 국가보훈처로 이관됐다고 하고요.

2020년에 박물관으로 승격됐다고 합니다.

중앙홀에 크로마키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네요.

일종의 포토존인데 조작을 발로 하게끔 되어있어요.

ㅋㅋㅋㅋㅋ웃으면 안 되는데 왜 때문에 웃기지.

우리 엄마도 파평 윤씨라는데 어찌 좀 닮았나요?

외부에도 윤봉길의사 동상이 있어요.

 

윤봉길 의사의 고향에서 어떤 청년이 아버지의 무덤을 찾으러 갔는데 한글을 몰라서 아버지 찾으려고 묘지의 묘표들을 죄다 뽑아가는 길에 윤봉길 의사와 만났다고 하네요.

묘표들을 다 뽑아버렸으니 묘지 주인이 누군지 찾을 수가 없게 되고....

그걸 보고 윤봉길 의사는 교육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윤의사는 학예회에서 아이들에게 <토끼와 여우> 공연을 하게 했다는 이유로 주재소에 끌려가서 호되게 당했다고 하네요.

동물이 조선과 일본을 비유했다는 이유에서였죠.

윤의사는 교육만으로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결국 칭다오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파출소에 잡혔다가 풀려났다고 하네요.

 

상하이에서 김구선생을 만나고 일본 무기고 폭발작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선제적인 정전협상으로 작전은 무산됐다고 하네요.

윤의사는 홍커우공원에서 야채장사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홍커우공원에서 일본의 고위각료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상하이의거 계획을 세웁니다.

행사에서 도시락을 주지 않으니 개인이 지참해야 한다고 해서 윤의사는 도시락폭탄과 물통폭탄을 들고 갑니다.

일본의 고위각료들에게 물통폭탄을 던져서 사망 및 중상을 입혔다고 하는데요.

그 사건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순국하게 되었고요.

상하이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중국의 장제스가 존폐 위기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고 하네요.

의거 직후 사건이 세계 만방에 재빠르게 퍼졌다고 합니다.

그후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은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언하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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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찰에 끌려가서 작성된 조서의 내용도 전시되어있었는데요.

일본경찰이 상하이의거가 효과가 없었다고 하는데 세계에 미친 파장으로 미루어보아 효과가 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죠?

 

윤의사 순국 당시 25살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20대 특유의 정의감이 발동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20대 초반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랬을 것 같거든요.

국가에는 좋은 일이었을지언정 한 사람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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